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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그들의 사과

Mad Min 2016. 6. 18. 14:47

미국에 살면서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들 중 하나. 여기 사람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사과를 하는 타이밍이다. 더 정확히는, 타이밍이라기 보다는 사과해야 할 이슈가 얼마나 중대한 것이냐가 되겠다. 웃긴 것이 그다지 사과할 필요가 없는 일에는 "I'm sorry." 를 남발하면서 정작 사안이 중대하면 미안하다는 그 한마디는 정말 듣기 힘들어진다.


예를 들어, 길이나 통로에서 서로 마주보는 방향으로 걸어가다 서로 길을 막게 되면, 멈칫 하면서 십중 팔구 "I'm sorry." 라는 말이 튀어 나온다. 그리곤, 왼쪽이나 오른쪽을 살짝 비켜 가던 길을 계속 가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 이런 경우가 생기면 누가 "죄송합니다" 라고 얘기 하는가? 사실, 이런 사소한 일에 미안함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고, 사과를 해야 할 만큼 특정인의 잘못도 아니지 않은가?


처음에는 이런 미국인들을 보며 공손하고 예의가 참 바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어떤 측면에서 이 또한 사실이기는 하다. 이들은 피상적인 인간관계에서 예의를 참 잘 챙기는 편이다. (이들의 타인의 프라이버시 배려라는 측면과 많이 겹치는 부분도 있다.) 그런데! 정작, 정말로 사과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 말을 듣기가 힘들었다. 예를 들어 누군가 그 사람의 100% 과실로 교통사고를 냈더라도 그 사람의 면전에서 아앰쏘리라는 말을 여기서는 절대 듣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잘못을 인정하기는 커녕 터무니없는 소송을 걸어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왜일까? 심하게 간단한 결론을 내리면 이게 다 돈때문이다. 왜 뜬금없이 돈? 다 알다시피 미국만큼 소송하기 좋아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소송에서의 패소는 곧 상대방에게 위자료나 배상금이라는 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까지 나왔으면 다들 이해했으리라 본다. 내가 상대방에게 이것이 나의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상대방이 승소에 대한 더 큰 확신을 갖고 소송을 걸어올 빌미를 제공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사실, 교통사고 현장에서는 쌍방 모두 웃으면서 서로 다친데 없냐고 물어보고 연락처까지 교환하는 등, 훈훈하게(?) 마무리하고는 집에 돌아와서 변호사에게 바로 전화해서 소송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10년 넘게 살면서 4번의 작은 교통사고가 있었다. 네번 모두 아무도 다친 사람은 없었고 차가 약간 상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모두 명백한 100% 상대방 과실에 의한 사고. 그런데, 이 네번의 교통사고에서 나는 사과를 받았을까? 이 개인적인 통계를 살펴보자. 2번은 사과를 현장에서 바로 받았고, 2번은 전혀 받지 못했다. 잉? 50% 비율로 사람들이 사과를 했다면 이 포스팅에서 말하는 주제를 뒷받침하기에는 좀 많이 약하지 않나? 그런데, 여기서 좀 더 살펴봐야 할 것이, 이들이 100% 오리지날 미국인이었냐는 것이다. 내게 절대 사과 한마디 꺼내지 않은 가해자들은 모두 미국에서 나서 자란 미국인들이었고, 나머지 50% 해당하는 사과를 한 가해자들은 영어도 약간 서툰 정도의 이민자들이었다. 한명은 중국인, 다른 한명은 히스패닉.


그 사과를 받지 못한, 좀 황당하고 화가 났던 케이스는 다음과 같다. 금요일 저녁 회사에서 퇴근하고 차를 몰아 저녁 약속 장소로 가고 있었다. 마침 사거리 신호등에 걸려 차를 세우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쿵 하고 차로 충격이 전해졌다. 정신 차리고 뒤를 보니 사과색 프리우스가 내 뒤를 갖다 박은 것이었다. 충격이 좀 있었던 것 같아서 차 뒷부분도 확인할 겸 차에서 내려 뒤로 걸어갔다. 차 뒷범퍼를 보니 전혀 망가지지는 않았다. 사실 범퍼 대 범퍼 저속 추돌로 차가 상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자, 그리고 그 뒷차를 쳐다보고, 프리우스 운전자와 눈이 마주쳤다. 차 안의 백인 아가씨, 표정을 보니 매우 당황스럽고 미안해하는 표정이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미안하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물론, 이때는 이미 미국에서 생활한지 꽤 시간이 지난 터라 이런 상황에 미국인에게서 사과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보통은 "Are you OK?" 정도는 묻는다… 이 처자… 뭔가 한마디 하기는 해야겠고 미안하다는 말은 하면 안되겠고,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창문으로 머리를 삐죽 내밀고 "Is your car OK?" 랜다.


뭐, 사과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이가 없다. 나도 예의상 다친 덴 없냐고 물을 수도 있었겠나, 그녀의 태도가 너무 괘씸해, 경멸스런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으면서 "저리 꺼지라"는 뉘앙스의 손짓을 해 보였다. 차를 다시 출발하면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참 어이가 없었다. 차가 상한 것도 아니고 다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소송을 당할 일도 없을진데, 어떻게 그 미안하단 말 한마디를 못하나.


이제는 이것이 미국만의 얘기도 아닐 듯하다. 한국도 사회, 경제 많은 부분에서 미국의 시스템을 따라하고 있고, 많은 부분을 법적인 소송으로 해결하려는 경향도 강해지는 것 같다. 한국에서도 곧 이런 상황에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듣기 쉽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