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영어, 영어! Subway.
외국 생활에서의 가장 큰 난관은 역시 언어 문제이다. 미국 생활이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이야 생활 여러방면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의사 소통에 무리가 없으니 무감각하긴 한데, 10년전 첫발을 내딛을 때는 정말… 언어의 장벽은 그때까지 느껴보지 못한 많은 좌절과 심지어 공포까지 안겨주었다. 중학교 1학년부터 시작해서 유학준비 시점까지 10년이 넘게 공부했지만 (물론 고등학교 졸업 이후 강요받지는 않았다.) 현지에 와서 그다지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만국공통어'를 번듯하게 구사할 수 없다는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그로 인해 일상 생활에 큰 불편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미국에 온 이후 제일 먼저 시도했던 식당은 Subway. 학교에 아주 가까이 있기도 했고, 한국에서 종종 이용했기에 만만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주문을 시작하면서 아주 첫마디부터 헤메기 시작했다. 빵 뭐할래? 치즈 뭐 할래? 야채는 뭘로? 드레싱은? 주 메뉴만 선택하면 그 이후로는 알아서 다 해 주는 한국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 "I'm sorry.", "Pardon me." 몇번 반복한 끝에 샌드위치는 대략 완성이 되고... 이제 돈만내고 가져 가면 되겠군 하고 생각하는 찰나. 점원 한마디 더 날리기를 "For here, or to go?" 흠, 사실 이렇게 들리지도 않았다. 한 3-4음절 정도 돼 보이는 외계어 정도? 이 점원은 과연 영어로 얘기한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사이 점원이 한번 더 똑같이 반복해서 말해줬다. 휴... 이번에는 끝부분의 "to go" 가 들렸다. 즉시 자신만만하게 "Yes!" 라고 말했다. 음, 처음부터 어색했던 둘의 대화는 더 어색한 분위기가 되고... 그 점원 이번에는 한 단어씩 끊어서 얘기해 준다. 그제서야 완전하게 알아들은 나. "To go, please." 샌드위치 한 조각 사먹는게 이렇게 불편하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막막한 기분에 하루 종일 우울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지만 그때는 어찌나 심각했던지.
여기까지 표현 중에 어려운 표현과 문법은 아무것도 없다. 중학교 1학년 (요즘은 유치원생도 그 쯤이야.) 수준의 표현과 단어들이었는데 나는 왜 그렇게 자존심을 구겨야 했을까. 개인적으로 이것저것 많이 생각해보고 도달한 결론은 두가지. 첫번째, 대화에서 상대방을 해석하는 상당 부분이 대화의 context에 의존한다는 것. 식당에서는 식당 나름대로 수퍼마켓에서는 수퍼마켓 나름대로 대화의 목적이 정해져 있고, 상대방이 문자 그대로 무엇을 말하느냐를 떠나서 이미 대화의 상당부분이 자동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에 대한 경험이 이미 없다면 상대방이 하는 얘기를 집중해서 정확히 듣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식당이라도 여기 생활 경험이 전혀 없으니 더욱 알아듣기가 힘들었던 것. (이 부분은 사실 좌절스러운 부분이 아니다.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부분이니까.) 두번째 요소는 첫번째보다 훨씬 극복이 힘든 부분이다. 이는 근본적인언어의 차이에서 오는 것인데, 한국어와 영어는 음성언어 전달에서 중요시하는 부분이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다. 한국어는 각각의 음절을 정확히 구분해서 전달하고 강세나 높낮이는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반면 영어는 음절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을뿐 아니라 심지어 일부분 흘려버려도 상대방이 정확히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analysis" 에서 맨 앞의 "a"는 약하게 발음하고 때로 아예 발음하지 않고 "NALysis" 라고 얘기해도 다 알아듣는다. 한국 사람만 정확히 "어.낼.러.시.스."라고 발음하겠지. 웃기는 점은, 이러면 native 의 입장에서는 더 알아듣기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어린 나이부터 두 언어를 사용해서 bilingual 이 된 사람은 상관없겠지만 수십년간 한국식 음성 전달에 익숙한 사람은 여기에 익숙해지기 굉장히 힘들다. 앞으로 돌아가 Subway 얘기를 다시 하자면, 그 점원은 성의없이 대충 흘려가며 얘기를 했지만 그것은 native 들이 지극히 평범하게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강한 억양과 장단이 강조되는 경상도 사람들이 영어 음성 전달에서 타 지방 사람보다 더 유리할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