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전에 한번 얘기했듯이 한국어와 영어는 음성언어 전달에 있어서 강조해야 하는 포인트가 전혀 (x100!!!) 다르다. 한음절 음절 정확한 발음을 중요시하는 한국어와 달리, 영어는 각 음절의 정확한 발음보다 단어의 강세와 문장의 소리 높낮이가 훨씬 중요하다. 예를 들어 "analysis" 는 한국어처럼 "어.낼.리.시.스" 로 발음하면 잘 알아듣지 못한다. 제대로 발음해서, 강조점을 표시해서 쓰자면 적당한 발음은 "러시스" 정도? 맨앞의 "a" 는 슈와 (schwa) 라고 하며 거의 발음이 되지 않는 요소이다.


영어에서는 강세와 억양 외에 한가지 더 중요한 요소가 있다. 바로 단어에서 음절의 장단이다. 한국어 단어에도 물론 장단의 구분이 있는 것이 더러 있다.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국어시험 단골 메뉴로 등장한 "말" (horse) 과 "말-" (language) 같은 것들? 하지만, 단어 뜻의 구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는 한국어보다 영어에 훨씬 많은 듯 하다. 


그리고, 영어에서 장음과 단음이라는 것은 특히 소음이 심한 장소에서 강세, 억양과 함께 음성을 전달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의 뇌는 background noise 가 심각한 상황에서도 이러한 음성 변화에 따른 차이점을 이용해서 상대방 음성을 파악하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 그러나, 한국어처럼 발성 자체가 단순한 monotonic 발음은 시끄러운 장소에서 알아듣기 상대적으로 힘든 편이다.)


그럼, 제목에서 나온 것처럼 빌 (bill) 과 비어 (beer) 가 무슨 관계가 있나? 한국어 발음으로 볼 때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 딱딱하고 재미없는 내용을 설명하기 전에, 10여년의 개인적인 경험을 먼저 얘기하는게 덜 지루할 것 같다.


대학원 시절. 주말 저녁 친구와 함께 PF Chang 이라는 중국 레스토랑에 밥을 먹으러 갔다. (말이 중국 레스토랑이지, 사실 정통 중국 요리와는 거리가 멀고 미국식 중국음식 --이라 쓰고 "달고 짠 음식" 이라 읽는-- 을 파는 좀 깔끔한 레스토랑 정도라 보면 되겠다. 그 때 한번 가본 이후로 가 본적이 없다. 잘 찾아보면 맛있는 진짜 중국 요리집이 많은데, 굳이 더 돈들여서 그런 데 갈 이유는 없는 듯.) 금요일 저녁이라 식당은 많은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종업원들이 바삐 돌아다니며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하고 있었다. 


역시나, 별로 놀라울 것 없는 미국중국음식으로 식사를 마치고, 계산서를 받기 위해 종업원을 불렀다. 그리고, "Can I get the bill?" 이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별로 이상할 것 없는 정상적인 표현인데… 일단 그 금발 여종업원은 나의 첫 시도(?)를 못알아 들었다. (발음이 그렇게 나빴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름 괜찮았는데… 한군데 문제가 있었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레스토랑 안이 무척 시끄러운 상황이라 좀 더 크고 정확하게 발음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말했다. "Can I get the BILL?"


그 여종업원 눈을 한번 깜빡이고 잠시 생각하더니, "Do you want a beer?" 랜다. 잉? 어디가 잘못 됐을까? 다시 목을 가다듬고 bill 의 L 발을을 잘못했나 싶어, 그 부분에 조심해서 다시 "Can I have the BILL?" 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종업원, "Beer?" 라고 되묻는다. 허허. 참 난감해졌다. 아니, 이 간단한 문장이 이렇게 전달이 안될 수가 있지? 식당에 같이 앉아있던 친구, 사태를(?) 관망하며 살짝 미소를 띄고 그대로 앉아있다. 뭔가 알고 있는 눈치다.


어쨋든, 이런 경우 만국공통의 솔루션, 바꿔 말하기 (rephrase). "Can I get the check?" 라고 바꿔 말했다. 그랬더니 종업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계산서를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한테 왜 종업원이 못알아들었는지 물어봤어야 했는데, 다른 얘기를 하느라 깜빡하고 물어보지 못했다. 당시는 그다지 인상적인 일이 아니라 느꼈는지 별로 기억하지도 못했던 듯 하다. 그리고 1년 뒤 갑자기 어학 강의를 들으면서 뭐가 잘못됐는지 깨달았다.


당시 다니던 학교는 규모가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상당히 체계적인 방식으로 어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같은 비영어권 외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 이론 강의와 개인 교습을 해줬는데, 수업의 질이 참 뛰어났던 것 같다. 필수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강의나 교습은 아녔지만, 개인적으로 마음만 먹으면 영어의 다양한 분야에서 수준을 향상 시킬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아무튼, 그때 들었던 발음 수업 중 하나가 영어의 장음 단음에 대한 것이었다. 그 수업 강사는 학생들에게 고무 밴드를 하나씩 나눠 주고 장음을 발음할때는 밴드를 주--욱 늘이면서 그 느낌을 익히도록 했다. 나는 집에 돌아와 몇몇 단어를 찾아보면서 고무 밴드를 죽죽 잡아 당기고 앉아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혼자 무슨 청승이었는지 모르겠다.) 별안간 1년 정도 전의 PF Chang 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는 것 아닌가?


그랬다. 한국 사람 입장에서 봤을때 너무나 다른 두 단어 bill 과 beer. 미국인 입장에서 다른 관점으로 발음을 구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bill "ㅂ ㅣ ㄹ" 에서 "이" 발음은 짧게 발음하는 단음이고 beer "ㅂ ㅣ ㅇ ㅓ" 에서 "이" 는 뒤의 R 발음과 이어지며 더 길게 들린다. 그런데, 당시 나는 레스토랑에서 bill 을 장음으로 발음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 실내가 좀 조용했다면 그 종업원이 알아들을 확률이 좀 높아졌겠지만, 주변은 무척 시끄러운 상황이었고, 발음의 강세, 억양, 장/단음은 상대방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bill 에서 마지막 L 발음을 정확히 하더라도 "이" 를 길게 발음해 버리면 입 뒤 깊숙한 부분에서 나는 L 발음은 왠지 전체적인 발음을 "비어" 에 가깝게 이끌어버리고 만다.


다시 말하지만, 영어에서는 각 음절의 정확한 발음이 제일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물론 정확하게 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지만, 각 음절의 발음이 약간 부정확하더라도 듣는 이로 하여금 말을 아주 못알아듣게 하지는 않는다.) 쉬운 비유를 들자면, 노래 가사를 전혀 발음하지 않고 허밍으로만 노래를 불러도 듣는 이들은 노래 박자와 음 높낮이로 정확하게 그 가사를 머리속으로 유추해 내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 할 수 있다.


bill 과 beer 말고도 비슷한 예가 하나 더 있다. book 과 booze (술). book 은 단음이고 뒤의 부-즈는 장음이다. 한국어식으로 생각해보면 북 과 부즈? 이게 어떻게 헷갈릴수가 있지?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영어식 발음에서 각각 단어 끝부분의 k 와 ze 아주 약하게 뭍어가듯 발음하기 때문에 이는 두 단어의 발음을 구분할 수 있는 아주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앞의 모음 "우" 발음이 장음이냐 단음이냐가 원어민에게는 훨씬 큰 차이로 작용하는 것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book 과 booze 의 차이도 역시 개인적인 경험으로 배운 사실이다. 아직도 그때 기억이 참 생생하다. 책사러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온 내게 룸메이트가 어디 다녀왔냐고 물었다. 책 사왔다는 나의 대답을 들은 룸메이트, 근데 술은 어딨냐며 되물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하. 그래도 이때는 미국 생활이 4년 가량 지난 시점이라 내가 뭘 잘못했는지 곧바로 깨달았다. 이때까지도 개인적으로 영어 발음이 나쁘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단어 강세와 문장의 억양이 괜찮은 편이었고, B/V, L/R 발음 등이 정확한 편이었기에. 그런데, 이후에 장/단음 구분이 좋아지면서 영어 발음에 훨씬 더 생기가 더해지고 상대적으로 명확해진 것 같다. 물론 시간이 8년 가까이 걸리긴 했지만...


강세, 억양, 장/단. 이 세가지만 잘 챙기면 영어로 내 말을 전달하는데 부족함이 그다지 없을진데, 우리는 왜 그렇게 음절당 정확한 "빠다" 발음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장/단 하나만 제대로 못챙겨도, 계산서 (bill) 달라고 했다가 맥주 (beer) 한잔 더 먹고, 책 (book) 달라고 했다가 술 (booze) 한잔 얻어 먹게 되는데 말이지.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10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