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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타이슨이 했던 멋있는 말이다. "누구나 완벽한 계획이 있다. 링 위에서 얻어터지기 전까지는…" (원문은 "Everybody has a plan until he gets punched in the face." 인데 좀 강한 느낌으로 의역하면 이 정도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복싱이라는 스포츠에 깊은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왕년의 전설적인 스타의 팬도 아닌지라, 저 인용구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나온 말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여러가지 다른 분야에서도 정곡을 찌르는 의미 심장한 말이다. 세상의 어떤 일도 애초에 계획했던대로 실행되는 경우는 없다. 링 위에 오르기 전에 어떻게 스텝을 밟고 어떻게 상대방을 공략할 지 세부적인 계획을 세워봤자 처음에 생각한대로 100% 정확하게 경기가 풀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순간 순간의 상황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원래 작성한 세부적인 계획에만 집착하면 당연히 타이슨이 말한대로 정신없이 얻어터지게 된다는 거다. 뭐, 그렇다고 반대로 아무 준비 없이 링 위에 올라 임기응변으로 싸워봤자 상대방과 실력의 격차가 크지 않다면, 그 또한 얼굴에 멍자국을 면하기 힘든 방법이다. 세상의 많은 일은 "유비무환" 이 최고의 가치냐 "임기응변" 이 최고냐를 정확히 나누어 설명할 수 없는 복잡도가 굉장히 높은 상황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단순화시켜 생각하자면 확고한 전략적 목표에 집착하며, 유연한 전술적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최선인가? 아무튼, 우리는 많은 경우에 훌륭한 계획 (plan/idea) 과 유연한 실행 (execution) 이라는 양극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일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보통 똑똑한 사람일수록 계획과 실행이라는 스펙트럼에서 계획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일반인들보다 머리 속에서 고려할 수 있는 변수들의 숫자가 훨씬 많기 때문에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모든 것이 고려된 완벽한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들이 더 좋은 계획을 세울 가능성은 훨씬 높으나… 세상의 많은 일은 무수한 변수를 가진 복잡한 것들이 대부분이고, 이런 모든 변수를 고려해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한 인간의 착각일 뿐이다. 상황을 단순화하면 많은 경우에 깔끔한 모델을 만들어 깊은 사고의 첫 시발점을 만들어 낼 수 있고, 더 정교한 모델로 다듬어 나가는 일이 훨씬 쉬워진다. 그러나 시뮬레이션과 실제 상황은 많은 경우에 다르다. 주로 발생하는 상황은, 열심히 계획을 짜다 보니 생각하지 못했던 변수가 떠오르고 다시 계획을 수정하고, 또 다른 변수가 떠오르고 이러한 과정을 무한정 되풀이하며 시간만 보내거나, "이 일은 완수가 불가능한 일" 이라는 결론에 이르러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자신보다 그다지 똑똑하지 못한 사람이 그 일을 멋지게 해내는 걸 보고 억울해하고 상심한다.) 이런 일이 개인적으로만 발생한다면 아주 나쁘지는 않겠지만, 조직 내에서 해를 끼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주어진 프로젝트에 대해 계획만 세우느라 실행이 안되는 경우, 또는 계획대로 진행이 안되면 불가능으로 판단하고 일찍 포기하는 경우. 최악의 경우, 온갖 위험 변수 백만개를 들이대며 다른 동료의 프로젝트를 막는 경우.
이제 세상이 예전에 비해 훨씬 더 빨리 바뀌고 복잡하게 흘러간다. 이렇다 보니 요즘 더욱 "발사! 조준…", "Fail, fast, forward" 같이, "일단 닥치고 실행" 에 가까운 유명인사들의 모토가 쏟아져 나온다. 심지어, 실수가 허용되지 않을 것 같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조차, "Move fast and break things. Unless you are breaking stuff, you are not moving fast enough." 라는 유명한 인용구가 있다. 페이스북의 마크 주커버그가 한 얘기다. 서비스 장애에 학을 떼는 DevOps (개발운영팀) 가 듣는다면 참 난감할 얘기인데, 주커버그가 강조하는 바는 서비스를 만들어 운영하면서 뭔가 지속적으로 망가지지 않는다면, 당신의 서비스는 새로운 것들을 재빨리 시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소프트웨어 개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새로운 기능/코드의 추가는 곧, 새로운 버그와 심지어 보안취약점의 추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무튼 이와 같이 재빠른 실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얘기가 각기 다른 분야에서 성공한 이들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은 많은 상황에 들어맞는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일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인간은 대부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앞에서 나온 얘기들은 즉각적인 실행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지 계획의 부재를 얘기한 것은 아니다. "발사! 조준… 발사!" 이지 "발사! 발사! 발사!" 가 아니란 말이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계획과 실행이라는 것은 칼로 자른듯 둘로 정확히 나눌 수 있는 개념이 아니란 것이다. 결국, "… -> 계획 -> 실행 -> 계획 -> 실행 ->…" 의 반복적인 피드백 루프 (feedback loop) 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정확한 계획을 세울 수 없으니 일단 뭔가 시도해 보고 결과를 분석한 후에 다시 계획을 세우고 또 실행해 보고, 계획을 다시 세우고 (또는 손보거나) 또 실행하고… 이런 과정을 되풀이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무한반복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처음에 설정한 전략적인 목표뿐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나는 정교한 계획보다는 실행에 좀 치우친 유형인 것 같다. 뭔가 착수하기 전에 신중하게 이것저것 생각해 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원은 시간과 타이밍이다.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우더라도 실행에 소요되는 시간과 타이밍을 놓친다면 완벽한 계획인들 별다른 소용이 없다. 그리고 이미 나온 얘기처럼 완벽한 계획과 작전은 이상 세계에서나 존재하는 개념이다. 우리는 보통 잘못된 실행의 결과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아예 실행하지 않음"에 대한 댓가에 대해서는 별로 전자만큼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빈라덴 제거 작전을 다룬 영화 Zero Dark Thirty 에 보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빈라덴의 은신처를 추적하던 여주인공은 결국 파키스탄 한 교외의 맨션을 유력한 장소로 지목하는데, CIA 윗선에서 오판의 위험성때문에 쉽사리 작전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시간을 보낸다. 그곳에 빈라덴이 숨어 있다는 더 명확한 근거를 확보하라는 것이다. 그때 등장하는 대사, "그럼 그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대한 위험성은 어떻게 평가하죠?" ("How do you evaluate the risk of *not* doing something?")… 결과는 다 알다시피 작전성공.
물론, 얼마만큼 계획하고, 어느 타이밍에 어느 정도 규모로 실행할지는 아무도 정답을 주지 못하는 부분이다. 결국 시쳇말로 "케바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