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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마켓이나 기타 상점에서 계산대에서 물건값을 치르고 나가는 시간은 보통 굉장히 짧은 편이기에, 캐셔와 손님간의 대화는 별로 없는 상황이다. 그래도, 한국에 비하면 모든 일의 처리가 느린 편인 미국에서는 물건값의 지불외 다른 일상적인 대화가 오갈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은 편이다. 이런 일상의 피상적인 부분에서 미국인들이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하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날씨 얘기, 손님이 몸에 걸친 악세사리에 대한 얘기, 구입한 물건에 대한 얘기 등등.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그리고 안전한!) 주제의 얘기가 오가게 되는데, 보통 가벼운 주제의 농담을 주고 받기도 한다. 인종, 문화 등 여러 사회 요소가 다양한 미국 사회에서는 말이나 행동에 있어 여러 다른 배경의 사람들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한마디 한마디 꺼내기가 힘들 것 같기도 한데… (예를 들어, 인종, 국적에 관련한 노골적인 농담은 금기 사항이다. 그런데 스탠드업 코메디의 단골 소재이기는 하다.) 오래 적응해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안전한 대화 주제를 (그러나 얕을 수 밖에 없는) 금방 찾아내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그다지 힘들지는 않은 모양이다.


물론, 나는 먼저 캐셔에게 딱히 물건에 대해 물어볼 일이 없다면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먼저 말을 거는 법은 없다. 한번은 충전 케이블을 사기 위해 버클리 근처의 라디오섁 (RadioShack, 전자기기 등을 파는 유명한 미국 체인점. 아마존 같은 회사들때문에 요즘 거의 망한 것 같음) 에 들른 적이 있다. 마침, 오랫동안 빨래를 하지 않아 위에 티셔츠 위에 걸쳐 입을 간단한 것이 구글 로고가 크게 새겨진 후드 자켓 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어떤 종류건 로고가 크게 새겨진 옷을 입는걸 꺼리는 편인데, 어쨋건 그날은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 후드티는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 하지는 않았다… 단지 구글에서 입사제안를 받으면서 오퍼 패키지에 따라온 잡다한 선물 중 하나였기에 기념으로 가지고 있었을 뿐.) 아무튼, 그 라디오섁의 점원도 어색한 침묵을 쫓기 위해 안전한 대화 주제를 찾고 있었나 보다. "구글에서 일하시나 봐요?" 라고 물어보는 거다. 그 점원에게 사실 내가 실제로 구글에서 일하는지 아닌지는 별달리 중요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을 거다. 단지 한마디 건내고 싶었을 뿐. 그리고 실리콘밸리나 샌프란시스코 근처에서 구글 로고가 새겨진 옷을 입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구글이 기념품을 사람들한테 엄청나게 뿌려대는데. 그 순간 나는 내가 선택한 케이블에 대해 이런 저런생각에 골몰하다 보니, 별생각이 없이 "아뇨, 아직이요" ("Not yet.") 라고 짧게 대답해버렸다. 그런데, 대답해 놓고 보니 내 답이 좀 이상하긴 했다. 그 점원은 몇초가량 눈만 껌뻑껌뻑 하더니 푸하하하 하고 폭소를 터트리는 거다. 웃음을 가까스로 멈춘 그, "You're a funny man. Haha. That was a good one." 라고 너무 좋아한다. 일단, 여기서 상황을 더 자세히 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나는 어쨋든 졸업 후 몇달 뒤에 구글로 갈 예정이었으니 아주 정확한 대답을 하자면 "아직" 이라는 말이 맞다. 그런데, 그 점원의 입장에서 이 사람이 구글 직원은 아닐 것이고, 그냥 옷에 그려진 로고를 보고 그 질문을 의미없이 던졌을 뿐이다. 그런데 이 허름하게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 (나) 이 '아뇨, 아직은 아닌데, 그쯤은 그냥 맘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죠' 라는 투로 호기롭게 농담을 들이대는 상황이 된 것이다. 뭐 아무튼, 해명을 할 필요도 없는 상황이고 나도 같이 씨익 웃고는 서둘러 가게를 나왔다.


이렇게 농을 던지지 않아도 알아서 농으로 받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너무 진지해서 농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오래 전에 친구와 중서부쪽으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찾아오는 사람이라고는 관광객이 대부분인 작은 시골 마을에서 관광버스는 잠시 쉬었고, 나는 친구와 음료수를 사먹기 위해 근처의 작은 수퍼마켓에 들렀다. 큰 병, 작은 병에 든 다른 두종류의 음료수를 골라 계산대에 올려 놨다. 그런데 캐셔 아줌마, 바코드는 찍지 않고 눈으로만 대략 보고 계산을 마무리하려던 찰나, 큰 병 뒤에 살짝 가려 작은 병이 잘 안보였는지, "Oh, there's another one." 하면서 다시 계산을 정정했다. 나도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는데, 이렇게 농담을 던졌다. "아, 안타깝네요. 공짜로 하나 더 마시는 거였는데." 라고. 평소라면 이러지 않았을 건데, 밖으로 여행 나와 있으니 마음이 좀 느슨하게 풀려 있었나 보다. 아무튼, 그 아줌마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지 않고, 내가 고의로 그랬다고 생각했는지, "You stinker!" 이렇게 쏘아붙이는 거다. 뜻은 "이 사기꾼아!" 정도? (뭐, 상황마다 다르긴 한데, 특별히 "여자들을 등쳐먹는 사기꾼" 이라는 뜻도 있다.) 이후 별 심각한 상황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게 수퍼마켓을 나왔다.


가끔은 달콤한 말을 해주는 사람도 있다. 대학원 시절, 매주 수퍼마켓에 일주일치 먹을 거리를 사기 위해 갔었는데 그곳의 캐셔들은 일반적으로 손님들에게 친근한 말을 거는 빈도가 더 높은 편이었다. 그날도 별다른 생각없이 계산대에 섰는데, 줄 뒤에 서 있을때부터 좀 뚫어지게 쳐다본다는 것이 느껴졌는데, 내 차례가 오니 뜬금없이 자기가 보는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어떤 배우가 나와 닮았단다. 이건 뭐... 한국에서도 아니고 미국에서 외국인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으니 좀 황당해서, 다시 물어봤다. 그거 칭찬이냐고. 그랬더니 칭찬 맞단다. 그런데, 그 배우 이름은 모르겠단다. 그래서, 드라마 제목을 물어봤지만, 어차피 한국을 떠나온 지도 오래됐고 모르는 드라마. 박사과정 말기 찌들어 있던 삶에 '그래도 이런 얘기도 들어보네…' 기분이 좋아져 집으로 돌아왔고, 그 드라마가 뭔지 찾아봤다. 그리고 도대체 누굴 닮았다고 한것이지 찾아보는데… 역시 그럼 그렇지. 그들은 역시 립서비스에 대해 교육 받은 사람들이었나 보다. 그 드라마의 누군가와는 닮았을 것 같긴한데, "미남"은 아니었었던듯. 그 립서비스 캐셔의 이름은 Vikie. 아직도 정확히 기억한다. 왜냐면, 공교롭게도 미국에서 당시 인기있던 아시아 (주로 한국) 드라마, 영화 스트리밍 서비스가 Viki 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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